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즈키 간타로 (문단 편집) === 정치인 시절 === 5년 후인 [[1929년]]에 [[히로히토]]의 부탁을 받고 궁내성의 시종장이 된다. 사실 시종장은 덴노를 섬긴다는 것 외에는 별 일이 없는 한직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덴노를 섬기는 명예직을 거절했다'는 세간의 눈총을 받기 싫어서 결국 승낙하고 현역에서 은퇴한다. 그의 나이 61세였으니, 이것이 사실상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후로 15년 가까이 시종장을 맡으면서 히로히토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이 때문에 청년 장교단의 질투와 시기를 받게 되었고, 이후 덴노의 옆에서 농단을 일삼는 [[간신]]으로 지목되어[*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배후로 여겨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2.26 사건]] 때 피습당하는 원인이 된다. 2.26 사건 당시 새벽 5시경에 안도 데루조 육군대위가 지휘하는 [[황도파|반란군]] 일대가 습격했다. 다수가 동시에 시종장을 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던 안도 대위는 부하들을 내려보낸 뒤 "각하, 쇼와 유신을 위해 목숨을 거두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이때 스즈키 간타로는 안도 대위와, 뒤이어 나가타 상사가 쏜 총에 왼쪽다리, 왼쪽가슴, 왼쪽 머리부분을 맞고 쓰러졌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시종장을 향해 도고메 상사가 최후의 일격을 종용하자, 피가 흥건한 [[다다미]] 위에 쓰러진 스즈키에게 안도 대위는 군도를 빼려 하였다. 이때 스즈키의 아내였던 다카가 "제발 그것만은 하지 말아주세요"라며 만류하였고, 익히 스즈키의 인품을 알고 있던 안도 대위는 망설임 끝에 반란군들을 이끌고 그대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스즈키 간타로는 '''총탄을 3발이나 맞고도 살아남았다!''' 스즈키를 총애하던 히로히토는 '''"짐의 수족인 노신"'''을 쓰러뜨렸다며 격노, 2.26 사건의 적극진압을 명령하였다. 당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는데, 3발 다 중요한 신체기관과 아주 약간씩 빗겨서 맞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하늘이 돌봤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했다. 게다가 스즈키 본인도 대담하게 반란군 장교들을 맞이했고, 가족들도 반란군의 총격에 강하게 저항한 덕분에 부상에서 빨리 회복해 시종장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스즈키 간타로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충격이 컸던 것인지 이후 시종장직을 사임했다. [[1944년]]에는 [[추밀원(일본)|추밀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44년의 일본은 사실상 막장 상태로 흘러갔고, [[도조 히데키]] 이후 취임한 [[고이소 구니아키]] 총리가 도조 뒤를 이어 삽질을 계속하자 원로 중신들이 탄핵해 고이소를 물러나게 했고, 후임 총리를 정하기 위해 모였다. 당시 [[와카쓰키 레이지로]]와 [[고노에 후미마로]], [[오카다 게이스케]]는 스즈키 간타로를 추천했고, 도조와 고이소, [[히로타 고키]]는 육군 원수 [[하타 슌로쿠]](1879-1962)를 추천했다. 도조는 '''"육군이 국토 방위의 주력군이기 때문에, 육군 이외의 사람이 총리가 되면 육군이 외면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사실상 중신들을 '''협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스즈키 간타로를 임명했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이때 하타가 총리가 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타는 무조건 항복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다만, 하타는 서일본 지역 방위를 총괄하는 제2총군 사령관이었는데 사령부가 [[히로시마]]에 있었다... 히로시마에 [[리틀보이]]가 떨어질 때 자신은 늦게 출근한 덕에 목숨을 건진 후. 무조건 항복에 찬성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